1986년 4월 28일

1986년 전후 학생운동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은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반미의식을 일깨우는 시발점이 된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군부세력은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군대를 동원하여 총칼로 짓밟았다. 이를 계기로 사회운동진영은 광주학살이 군사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용인 하에 진행된 것이며, 미국은 군부독재의 수호자이자 배후조종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 12월 9일의 광주 미문화원방화사건에 이어 19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과 강원대 성조기 소각사건, 19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등 반미투쟁은 지속적으로 확산, 심화 되었다.;xNLx;;xNLx;1986년 3월 결성된 서울대 학생운동 비합법 조직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은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에 기초하여 투쟁의 영역을 반미자주화투쟁, 반파쇼 민주화투쟁, 조국통일 촉진투쟁으로 설정하였다. 이들은 4월 10일에 공개투쟁기구인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를 결성하고 그 산하에 ‘반전반핵평화옹호주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학 2학년생들의 전방입소 의무군사교육을 ‘양키 용병 교육’이라고 규정하며 전면적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1986년 4월 28일 아침, 교문이 폐쇄되자 전방입소 대상자인 서울대 2학년 학생 400여 명은 신림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연좌농성을 전개했다. 그들은 전날 의대 연건캠퍼스 농성이 좌절되고 26일 아침 교문이 폐쇄된 것에 항의하며 전방입소반대투쟁을 전개했다.;xNLx;;xNLx;연좌농성이 시작된 지 2~3분 후인 오전 9시 30분경, 부근 서원예식장 옆 서광빌딩 옥상에서 이 연좌 농성을 주도한 김세진(자연대 학생회장)과 이재호(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장)는 유인물을 뿌리고 “반전 반핵 양키 고홈”과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 반대”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몸에 시너를 붓고, 경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였다. 이를 무시하고 경찰이 강제 진압하러 접근하자 자신들의 몸에 불을 갖다 대었다. 9시 40분경 두 사람은 신림 4거리 양지병원에서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재호는 전신 80% 이상의 3도 화상을 입었으며, 김세진은 전신 60% 이상의 3도 화상을 입었다. 4월 29일 서울대 정치학과 학부생 및 대학원생들은 경찰 병력이 한강성심병원 주변을 포위한 가운데 병원 및 일대 영등포시장 부근에서 시위 및 연좌농성을 벌였다. 김세진과 이재호는 각각 5월 3일 오후 5시 30분과 5월 26일 오후 3시 50분경에 사망하였다. 이재호, 김세진의 분신 사건은 전방입소 거부운동과 반미운동을 전국 대학으로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1989년 1학기부터 대학생 군사교육은 완전히 폐지되었다.;xNLx;;xNLx;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사상이론과 조직노선을 중심으로』

1980-10-10 09:00:00

북한 조선노동당,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김일성이 1980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제의하였음.이는 기존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발전시켜 완결한 것으로 제안은 크게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음 (남한이 먼저 이행해야 할 선결조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정부의 성격 및 구성,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수립후 시행할 정책)

1980-12-09 09:00:00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 발생

1980년 12월 9일 저녁 전라남도 광주시내에 있던 광주 미국문화원에 전남 지역 농민회 회원인 정순철, 김동혁, 박시영, 윤종형, 임종수 등과 대학생들이 방화한 사건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 이후 미국의 태도에 분노한 농민운동가와 학생운동가들은 미국 대사관과 각지의 미국 문화원에 항의성 시위 집회를 하였음. 1980년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발생한 대한민국내 반미주의 시위에 영향을 주었음. 약칭은 '광미방'으로 불리며, 1982년의 광주 미국문화원 제2차 방화 사건과 구별을 위해 '1차 광미방'으로도 부름

1982-01-22 09:00:00

남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발표

전두환의 대통령 국정연설에서 제기됨 (주요내용 : 1.양측 주민들의 뜻을 대변하는 남북한 대표들로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한다. 2.협의기구에서 민족 ·민주 ·자유 ·복지의 이상을 추구하는 통일민주공화국의 완성을 위한 통일헌법 초안을 마련한다. 3.남북한 전역에서 민주방식의 자유로운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헌법안을 확정 ·공포한다. 4.확정된 통일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한다.)

1982-03-18 09:00:00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발생

1982년 3월 18일 최인순, 김은숙, 문부식, 김현장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른 반미운동의 성격을 띄는 방화 사건. 불은 약 2시간 만에 꺼졌지만, 미국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동아대학교 재학생 장덕술(당시 22세)이 사망했고, 역시 동아대학교 학생 김미숙, 허길숙 외 3명은 중경상을 입었음. 일명 부미방, 1차 부미방, 부미방 사건으로 불림

1983-11-11 09:00:00

서울시내 대학생, 레이건 방한반대 가두시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전두환 독재정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재야 민주인사들은 레이건 방한을 적극 반대하였음. 광화문네거리에 세워진 환영 아치가 불태워진 사건도 일어났음. 레이건 방한을 계기로 미국 등 외신에서는 한국의 정치·인권 상황에 관심을 보이기도 함

1984-04-13 09:00:00

전국 55개 대학 학원민주화 요구 시위 및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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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09-27 09:00:00

서울대 총학생회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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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03-02 09:00:00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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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03-18 23:25:53

대검 공안부, ‘삼민투위 사건' 수사 발표 및 관련자 56명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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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03-27 09:00:00

남북적십자회담 재개

1985년 5월 27일∼30일에 열린 제8차 본회담에서 8·15 광복 40주년을 전후하여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추진하기로 합의함 (중단된지 12년만에 재개됨)

1985-05-07 09:00:00

서울대 삼민투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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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05-23 09:00:00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발생

삼민투위 주도로 서울대, 고려대 등 5개 대학 남녀 학생 73명이 현재의 서울특별시청 을지로청사 자리에 있던 서울 미국문화원을 기습 점거함. 미문화원 도서관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죄하라'는 등의 구호를 적은 종이를 창문에 붙이고 주한 미국대사와 면담을 요구하며 2층에서 단식 농성을 벌임. 72시간만인 5월 26일 자진 해산하고 경찰에 연행됨

1985-09-20 09:00:00

남북 상호 교환방문 실시

9월 20일∼23일 남북적십자 총재는 각기 151명씩의 방문단과 함께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였음. 최초의 인적교류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음

1985-10-01 09:00:00

남북체육회담 재개

1985년 10월부터 2년간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중재로 스위스의 로잔에서 서울 올림픽 대회 단일팀 구성에 관한 회담을 가짐. 북한이 'KAL기 폭파사건' 등을 일으켜 서울 올림픽 대회 방해공작을 감행해오자 성공적인 올림픽을 바라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공동개최를 적극적으로 권유해왔음. 대한올림픽 위원회(KOC)는 '올림픽의 도시개최'라는 올림픽 헌장준수를 명분으로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시켜 폭넓은 지지를 얻어냄. 결국 북한측은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수정·제안한 '일부 종목 북한측 개최안'을 거부함으로써 1987년 7월 15일 4차례의 회담으로 끝남

1985-10-19 09:00:00

김근태(민청련 의장), 법정에서 고문 진상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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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3-01 09:00:00

김세진, 서울대학교 자연대 학생회장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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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3-01 09:00:00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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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3-18 09:00:00

서울대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회’ 발족

서울대 반전반핵투위는 결성대회에서 “반전반핵 양키고홈”, “친미독재 타도하고 미 제국주의 몰아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대중집회에서 반미 구호가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1986-03-24 09:00:00

연세대에서 ‘학기중 전방입소 거부에 관한 범연세인 실천대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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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3-29 09:00:00

구국학생연맹(구학련)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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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4-03 09:00:00

서울대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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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4-08 09:00:00

전두환 대통령, 영국 <더타임즈>와의 서면회견에서 평화적 정권교체 실현의지 표명

"오늘날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헌법을 준수함으로써 헌법에 명시된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토록 하는 것이며.... 본인은 그것이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최대의 인내를 가지고 타협을 모색함으로써 이 과제를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1986-04-10 09:00:00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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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4-11 09:00:00

비동맹경제협력행동계획회의, 북한의 88서울올림픽 남북한 공동개최안 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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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4-16 09:00:00

자민투 산하 ‘반전반핵투쟁위원회’, 남영동 미군기지 근접시위 및 전방입소 거부운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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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4-16 09:00:00

이재호, 서울대학교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회' 투쟁위원장으로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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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4-21 09:00:00

성균관대생 전방입소 거부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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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4-26 09:00:00

서울대 중앙도서관 점거농성 무산

서울대 '전방입소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의 핵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는 대중적 의지를 모아 전방입소거부를 선언한 뒤, 입소훈련이 예정되어던 4월 28일부터 4일간 중앙도서관에서 농성을 하며 '민족대학'을 선포하고 강연과 문화프로그램 등을 운영할 계획이었다. 위기를 느낀 서울대학교 당국은 4월 26일 오전부터 28일까지 중앙도서관 휴관을 전격 결정하였고, 이로써 도서관농성은 불발되었다. 특별위원회는 입소일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어서 대안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1986-04-27 09:00:00

서울대 연건캠퍼스 의대도서관 점거농성 무산

서울대 '전방입소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의 핵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는 중앙도서관 점거투쟁이 좌절되자 대안으로 연건캠퍼스(의과대학교) 도서관을 농성장소로 정하였다. 김세진 책임하에 사전답사를 한 후 계획을 세워 특별위원회에 보고했고, 4월 26일 밤 계획대로 추진할 것을 결의했다. D-day는 27일 오후 1시, 농성현장 지도부는 김세진, 이재호로 결정되었다. 27일 아침, 두 사람은 연건캠퍼스에 미리 들어가 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정오가 되자 상황이 급변하였다. 사전에 정보가 경찰에 입수되었고 캠퍼스 주변에는 삼엄한 경계망이 둘러쳐졌다. 농성은 무산되고, 진입을 시도하던 학생 10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1986-04-27 21:00:00

김세진 등, 이정승 자취방에서 회동

밤 9시30분께 서울 흑석동 중앙대 건너편 원불교 회관 부근 이정승(당시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자취방에 모여, 전날(4월 26일) 서울대 의대도서관 점거농성 계획 실패에 따른 대책을 논의함. 이튿날(4월 28일)로 예정된 전방입소에 맞춰 거리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전방입소반대투쟁을 마무리짓기로 함. 4월 28일 시위 계획: (1) 장소는 신림사거리 부근 가야쇼핑 앞 거리 (2) 현장 책임은 김세진 (3) 1차 시위가 무산될 경우 신대방삼거리에서 공대 학생회장 장유식 주도로 2차 사위 (4) 마무리 집회는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이정승 주도로 진행

1986-04-28 09:30:00

김세진과 이재호 분신

김세진과 이재호의 주도로 서울대생 400여 명이 신림사거리에서 거리시위를 진행하던 중 김세진과 이재호가 "전방입소 전면 거부, 한반도 미제 핵기지화 결사 저지"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산반대,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하였고, 곧 병원으로 이송됨

1986-04-29 09:00:00

야권지도자회의, 전방입소문제 관련 과격행동 자제 촉구

김대중 김영삼 등 "반미, 반핵, 해방 논리 지지 못해" ; 일부 학생 과격행동 자제 호소 ; "전방입소 훈련 이단 중지 대폭적인 제도 개선 필요"

1986-05-05 09:00:00

김세진 장례식( '김세진 열사 민족장')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주최한 '김세진 열사 민족장'에 대해 경찰은 가족들에게 “화장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가족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삼엄한 경비 아래 치러졌다 (장소 : 서울대학교)

1986-05-21 09:00:00

서울대와 고려대생 전방입소 반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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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5-30 09:00:00

이재호.이동수 추모집회 및 ‘직선제개헌쟁취를 위한 궐기대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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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8-11 09:00:00

김세진 백일탈상 추모제

1986-10-28 09:00:00

건국대 연합점거농성

-86. 10.28, 애학투련 결성식(건국대 민주광장) -10.31, 경찰, 대규모 진압작전 개시(일명 ‘황소 31 입체작전’) -11.04, 검찰, ‘공산혁명분자 건국대점거난동사건’ 발표 -11.05, 김대중, 대통령 불출마 선언

1986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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